하이에크의 저서 <노예의 길> 제11장에서는 사회주의계획이 어떤 식으로 자유와 진리를 왜곡하려 드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 수단으로는 선전을 들고 있다.
사회주의계획이 원하는 하나의 목적체계를 사람들이 충성하게 하려면 그 목적체계를 신봉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계획에서는 ‘선전’을 통해 이를 해낸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억압받는 느낌이 자유주의 국가보다 덜 두드러지게 보인다면 이는 선전이 효과적으로 먹혔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체주의에서의 선전이란 같은 목표 아래 같은 방향으로 개인을 좌지우지하도록 조정되어 통제력을 행사한다. 목적체계를 이루기 위해 개인의 도덕심과 진리에 대한 감각, 존중심 등은 침해당한다.
행위의 신격화와 정당화, 그리고 장애물
계획자는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아무 확정적 도덕적 규칙도 없이 쟁점이 발생할 때마다 소위 호불호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적극적 지지를 얻으려면 자신의 취향을 합리화하고 결정의 이유를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호소력 있게 제시한다.
그렇게 행동을 정당화할 ‘신화’를 만들어낸다. 한 번 신조를 세우고 나면 이 신조는 의문을 품는 게 금지된다. 철학자 플라톤을 말을 빌리면 이런 건 고귀한 거짓말(noble lies)라고 하는데, 마치 과오를 대의를 위해 저질렀다는 터무니없는 정당화라고 볼 수 있다.
전체주의의 이러한 선전과 신격화를 가로막는 건 무엇일까? 독립적 사고와 비판, 체제에 대한 의심이다. 모든 활동은 정당성을 의식적인 사회적 목적에서 도출해야 하는데, 체제의 개입없는 자생적 활동, 독립적 사고는 계획을 위협할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서 독립적 사고를 박탈하고 소수의 비판을 침묵시킨다.
정보는 통제되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진리를 탐색하는 역사, 법, 경제학도 탄압 대상이며 오직 허용되는 건 공식적 견해를 옹호하는 것만 허용된다.
→ 나팔수만 사회에 늘어나는 꼴이다.
왜곡되는 자유
전체주의, 계획주의가 그것들의 가치를 사람들이 타당하다고 여기고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으로는 이 가치가 원래부터 있었고, 다만 적절하게 이해되지 못했거나 적어도 최선의 사람들만 지니고 있었다고 설득시키는 방법이다.
가장 효과적인게 예전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의미를 바꾸는 방법이다.
그렇게 가장 피해를 본 게 “자유”라는 단어이다.
우리가 원래 알던 자유의 의미를 파괴하는 곳에서는 늘 새로운 자유를 약속한다는 명분으로 행해졌다. 과거의 자유 대신 새로운 자유를 약속하며 유혹하는 모든 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진리와 사상의 자유
지적 자유, 사상의 자유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개인이 어떤 것을 쓰거나 생각할 수 있다는 능력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사상이라도 자유롭게 제기될 수 있는 데 있다. 서로 다른 지식과 견해가 상호 작용하여 사상의 생명을 구성하고 서로 차이점을 인정하며 이성이 성장한다.
그래서 개인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과정 앞에서 겸손해하고 다른 의견들에 대해 관용하는 태도이며, 사회과정에 대한 포괄적 지시를 요구하는 마음가짐의 근저에 놓여있는 지적 오만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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